부산어묵 역사

요즘 전국은 ‘부산어묵의 전성시대’다. 길거리 노점에 서서 먹던 군것질 음식이나 밥반찬으로 치부되던 어묵이 이제는 베이커리형 공간에서 사고 파는 고급 음식 으로, 또는 카페 등에서 커피나 맥주 등과 함께 먹는 어엿한 독립된 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부산의 어묵회사가 주축이 되어 부산발(發) ‘음식의 창조적 혁신’, ‘어 묵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대도시 기차역에 판매장을 두고 ‘어묵 고로 케’ 등 다양한 ‘베이커리 어묵’으로 대박을 치는가 하면, 대형백 화점 등에 입점하여 어묵을 베이스로 하는 어묵우동, 어묵샐러드 등 다채로운 고급 식품 개발로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 어묵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부산에서 시작하여 발전 되고 전파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럼 이 ‘어묵역사’는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문헌상 어묵의 발상지는 동아시아의 몇몇 나라이며, 나라별로 다양한 레시피가 있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 진나라 때이다. 당시 권력 자였던 진시황 (기원전 247~210년 재위)은 평소 생선요리를 즐겨 먹었는 데, 요리에서 생선가시가 나오면 요리사를 바로 처형시켰다. 이에 한 요리 사가 가시를 제거한 생선살로, 시황에게 ‘생선완자요리’를 만들어 바치자 매우 흡족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도 조선 숙종(1674~1720년 재위)때「 진연의궤(進宴儀軌)」 와「 산림경제」 등에 ‘생선숙편’과 ‘생선 완자탕’의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도 고훈시대(3~7세기)부터 두부와 생선살 등을 꼬챙이에 붙여 구워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는 오래전부터 생선살을 이 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음식을 해먹었다.

그중 지금의 부산어묵은 일본과의 다양한 인적 물적 교류로 인해 만들어 진 음식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역사적으로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사행 (使行) 때 접대 받았던 음식 중에 어묵의 원류가 있었고, 초량왜관 시절 조 선인들에게도 꽤 인기가 있었던 고급음식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에는 지역화, 대중화 과저을 거쳐 우리네 식 문화속에 깊이 자리잡기시작했다.

물론 당시의 이름은 어묵이 아니었다. 어묵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우리 국민이 우리 식으로 바꿔 부른 이름들 중 가장 보편화되어 오늘날 정착된 이름이다. 그러면 그 시절 한국에서 불리던 어묵의 이름은 어떤 것들이 있 었을까? 3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는 것으로 ‘오뎅’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봄 직한 이름으로는 ‘덴뿌라, 가마보꼬, 간또’ 등이 있다. 이 모두가 일본에서 건너온 이름들이다. 그럼 왜 우리 어묵에 이렇게 다양한 일본식 이름이 붙여졌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의 여러 종류의 어묵들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의 어묵은 네리모노(練り物)로 통칭된다. 생선살을 으깨거나 갈 아서 반죽을 만들고, 이를 다양한 모양으로 성형하여 찌거나 굽거나 튀겨 낸 음식이 네리모노이다. 일본 어묵요리의 총체가 바로 네리모노이다.

네리모노는 일본의 고훈(古墳, 3~7세기)시대 생선살을 나무 막대기 등에 붙여 불에 구워 먹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그 이후 제조방법에 따라 찌는것을 가마보코, 굽는 것을 치쿠와, 튀기는 것을 덴푸라로 대별해오며 가장 일본적인 음식 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가마보코는 헤이안(平安, 794~1192)시대에 영주들을 치하하는 잔칫상에 생선 으깬 살을 구워 올렸다는 기록에 등장한다. 갈아서 으깬 생선살을 대나무에 붙여 구운 것으로, 그 모양이 부들 꽃대와 비슷하다 하여 ‘가마보코’ 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에도(江戶, 1603~1868) 시대부터는 쪄서 조리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반죽한 생선살을 반달 모양으로 쪄낸 한펜(半片)이 대표적이다. 치쿠와는 에도시대 막대기에 생선살을 붙여 구운 후, 그 막대기를 뽑아내면 속이 빈 원통모양의 어묵이 되는데, 마치 대나무 통처럼 생겼다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덴푸라는 에도시대 말 류큐국(현 오키나와)과 교류가 있던 사쓰마(가고시마)에서, 기름으로 튀겨내는 요리법으로 가마보코를 만들기 시작 한 것이 시초다. 으깬 생선살(스리미)에 새우, 오징어, 연근, 톳 등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하여 덴푸라를 만든다. 대표적인 것이 생선 살과 전분만으로 튀겨낸 쟈코텐이 있다.

우리가 어묵을 지칭하던 ‘간또’가 여기서 파생됐다. 지리적, 문화적 교류 등 으로 인해 섬나라 일본의 향토음식이자 소울 푸드, 네리모노가 이웃나라 한 국의 어묵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모든 문화는 돌고 돌아 상 호작용하며, 결국 지역사람들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그 지역실정에 맞게 정 착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그렇다면 ‘부산어묵’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문헌상으로는 부산 중구에 소재하는 ‘부평시장’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1915년「 부평시장월보」에는 부평시장 내 주요점포 중 가 마보코 점포가 3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의 시장」에서는 ‘부평시장은 쌀, 가마보코, 채소, 청과물 등이 주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부평시장서 시작된 어묵(가마보코)은 부평동 부근에 들어선 대좌부(貸座敷)란 요정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고급 식재료였다. 대좌부는 일본식 유곽으로 술과 요리, 몸을 파는 일본인 창기(娼妓) 등을 원스톱으로 제공하던 곳이다. 이곳의 대표 요리가 가마보코를 재료로 한 ‘오뎅’이었다. 이 가마보코는 해방 전후로 해서 ‘음식문화의 대중화’ 과정을 거친다. 일본 인들이 남겨두고 간 어묵설비와 기술로, 우리 실정에 맞게 어묵을 생산하 기 시작했다.

1945년 한국인으로는 부산 최초로 부평동시장에서 어묵을 생산했던 동 광식품(창업자 이상조)이 그 시작이었다. 김동리의 소설「 해방」의 내용 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앞으로 조선이 독립이 되면 일본말뿐 아니라 옷이든 음식이든 일본 것은 모조리 못 쓰게 된다는 소문이었다. (중략) “아 니, 정말이여. 신문에까지 났다는듸. 저 가마보꼬는 참 일본 음식이 아니겠 지? 조선사람들도 잘만 먹으닝께.” 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여! 아니, 우리 는 가마보꼬가 없으면 밥을 먹는 같잖은듸.”(중략) “그것도 본데는 다 일본 음식이지.” “아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우리 조선 사람들도만 가지 요리에 다 쓰고 있는듸. 잔치에 안 쓰나 제사에 안 쓰나?”

소설에 따르면 당시 어묵은 이미 우리 식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한 식재료 임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부산어묵’은 그 시절 일본식 기술과는 다른 환경과 다른 제조방법으로 생산된다. 부산어묵은 자갈치시장을 중심으로 보급되었는 데, 당시에는 시장에서 위판되고 남은 생선이나 상품가치가 없는 생선을 ‘대수리’라는 돌절구에 함께 넣고 통째로 갈아, 정어리기름이나 고래기름 등에 튀겨내 어묵을 만들었다.

부산어묵의 제조공정은 크게 ‘막갈이’와 ‘덴푸라’로 구별된다. ‘막갈이’ 는 생선을 통째로 ‘갈아내는 것’을 말하고, ‘덴푸라’는 깡치(조기 새끼) 나 풀치(갈치 새끼) 등 잡어를 갈아 미군 드럼통으로 만든 기름 가마에 넣고 ‘튀겨내는 과정’을 말한다.

피란민이 몰려들면서, 부산에는 튀김 중심의 값싸고 영양가 높은 어묵이 호황을 누리며 대표적인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에는 부평깡통시장의 환공어묵, 영도 봉래시장의 삼진식품(창업자 박재덕) 등이, 1960년대 이후에는 부평깡통시장의 미도어묵을 비롯해 초량시 장의 영진어묵(창업자 박병수), 효성어묵, 대원어묵 등이 부산어묵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이 시기에 어묵은 주로 밥반찬으로 애용되었지만, 청주와 더불어 부산 의 문화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안주로도 자리 잡는다. 한때 남포동, 중앙동 등지에는 ‘부산어묵’의 따뜻한 국물에 청주 한 잔 마실 수 있는 대폿집이 많았다. 이곳은 부산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했 는데, 특히 비오는 날이나 유난히 추운 날, 삼삼오오 모여 예술을 논하 며 술잔을 기울였던 곳이다. 이 대폿집들은 대부분 계산을 바둑돌로 했 는데, 검은 돌과 흰 돌을 나누어 ‘돌 하나’에 ‘청주 한 잔’, ‘오뎅 한 접시’ 등으로 계산을 했다.

“약병같은 병뚜껑에다 바둑돌이 들어갈 구멍을 내고, 마신 대폿잔과 안 주 수대로 바둑돌을 집어넣는 거예요. 돌을 하나둘 넣을 때마다 딸그락 딸그락 바둑돌 쌓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지요.”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 의 말이다. 참 낭만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계산법이 아닌가?

현재 전국은 부산발 어묵열풍에 휩싸였다. ‘어묵로드’ 여행을 위해 부산을 찾는 이들이 연간 100만 명이 넘고, 부산 곳곳의 어묵매장에는 부산어묵 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있다. 전쟁 중 값싸고 양 많고 영양 풍부한 음식 으로, 그 시절 대한민국 식탁을 책임진 ‘공유의 음식’이자 ‘배려의 음식’이 었던 부산어묵. 비록 ‘최선의 음식’이 아니라 ‘차선의 음식’이었고 ‘대체의 음식’이었지만 부산어묵은 부산사람을 닮아 ‘늘 따뜻하고 착한 부산음식’ 이었다. 그 마음, 잘 보존하고 발전시킬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