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식품송종숙 사장

로도는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인 나로호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린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섬이다. 부평식품 송종숙 사장(1966년생)은 바로 그곳, 전남 고흥의 나로도 출신이 다. 나로호가 탑재한 위성이 지구 저궤도에 정확히 안착하였듯이 송종숙 씨도 나로도에서 날아올라 정확히 부산 부평깡통시장 현재의 부평식품에 정확히 정착하였다. 송 씨의 인생 또한 나로호의 성공에 못지않다.

“제가 나로도에서 상업계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랬더니 부산에 먼저 가 있던 사촌언니한테서 연락이 왔지요. 어디 경리일, 이런 걸 알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부산으로 오게 되었어요. 첫 직장으로 간 곳이 바로 부평깡통시장에 본점을 둔 영성식품 장림공장이었지요.”
송 씨가 입사할 무렵의 영성식품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로서는 공장을 몇 군데 운영하고 있는 규모가 큰 어묵업체였다. 나로도 처녀의 부산 입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로도 처녀는 장림공장에서 경리일을 보면서 생산 주문을 받았다. 본점인 부평깡통시장의 영성식품에서는 생산라인 때문에 장림공장으로 매일 전화를 했던 남자 직원이 있었다. 두 사람은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업무 전화 목소리로만으로 상대를 알았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장 림공장에 나타난 한 남자가 있었는데, 바로 송종숙의 남편이 된 남자, 김병현 씨(1958년생)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고, 사랑을 했으며, 결혼을 하였다. 송종숙 씨가 첫 직장으로 들어온 영성식품 장림공장의 본점은 현재 송 씨가 사장으로 있는 부평깡통시장 내 부평식품이 있는 바로 그 자리다.

1997년 IMF사태가 터졌다. IMF사태와 함께 찾아온 불황은 부평깡통시장 일대의 어묵업계에도 불어닥쳤다. 1950년대부터 활황대로를 걸 어왔던 어묵업체들이 타격을 입었으며, 동시에 기존 어묵업계의 지형도를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다.

출발점은 1998년 환공어묵의 부도였다. 일대 파란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 누군가의 실패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실패는 또 어느 날엔가 생각하지 못하였던 성공의 얼굴로 돌아오기도 한다.

당시 어묵업계의 어려움은 송종숙 부부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자신들이 임대를 얻어 사업을 하고 있었던 지금의 부평식품 건물이 매물로 나오게된 것이다. 부부는 자신들의 일터였으며, 임대를 얻어 첫 사업을 시작한 장소였던 이곳을 사들였다. 부평식품 간판이 커다랗게 걸렸다. 송씨는 첫 직장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 직장이 있는 건물 위층에서 아이를 낳아 길렀으며, 그 직장의 대표가 되었다. 멋진 인생이다. 부평식품은 현재 어묵과 국수류를 판매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이곳에서 직접 어묵을 생산했지만 현재는 하지 않고 있다. 어묵은 협약을 맺은 몇몇 업체와 직접주문 생산방식으로 제품을 공급받는다. 냉면, 생모밀, 감자수제비, 쫄면 등의 면류는 지금도 자체 생산시설에서 직접 생산하고 있다.

면류는 주로 성당이나 사찰 등 종교기관에 많이 들어가고, 어묵은 일반 가정집, 업소에서 많이 찾는다. “공장에 주문을 내면 공장에서 제가 주문한 대로 만들어 먼저 몇 가지 시제품을 가져옵니다. 그러면 저와 직원들, 그리고 주변인들, 시장사람들에게까지 시제품을 돌려 맛의 평가를 받지요. 그 중 가장 선호도가 높은 어묵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부평식품의 어묵맛은 제일이라고, 한결같다고 엄지척, 해주는 고객이 많지요. 수십 년 단골이 많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손님을 읽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한 번 온 손님은 며칠 뒤에 다시 다른 손님을 데리고 와요. 그러면 전 그분의 성향을 기억하고 한 번에 쫙, 담아 드립니다. 개개인의 성향을 나만의 방식으로 익혀요. 오랜 단골들이 많다 보니 단골들은 와서 이것저것 어묵을 고르지도 않고, 그냥 ‘내 꺼 주세요’ 이럽니다. 그럼 전 바로 그들 하나하나가 좋아하는 맛을 물어보지도 않고 찾아서 전달하죠. 그분들의 입맛을 제가 다 읽고 있거든요. 맛있는 음식을 팔면서 손님을 읽고, 또 우리부평식품만이 가지는 ‘우리만의 맛’을 지켜오기 위해서 노력을 해 왔 어요.”

부평식품 어묵의 맛을 평가한다면 편안한 맛, 조미료가 느껴지지 않는 맛이라고 한다. 오랜 단골이 많다 보니 그들만이아는 부평식품만의 ‘맛’이 있고 부평식품은 단골들의 ‘맛’을 읽어 그들의 입맛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다. 어묵을 찾는 사람, 연령층에 따라 인기있는 제품의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럼요, 당연히 있지요. 나이가 드신 분들은 납작하고 네모난 어묵과 둥근봉 모양의 어묵을, 우리 부평식품에서는 보뎅이라고하는데요, 이 두 가지를 아무래도 많이 찾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해물, 새우, 오징어같은 부재료가 많이 들어간 것을 선호하구요.”

“여기 부평시장은 예전부터물건이 고급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어묵도 여기는 최고급만 취급합니다. 중하품은 다루질 않지요. 최고급은 흰빛을 많이 띠어요. 어묵 자체로만 본다면 비싸고 뽀얀 흰살생선으로만 골라 어묵에 80% 이상을 투입하니 흰빛깔이 날 수밖에요. 아무래도 가격이 싼 고등어나 등푸른 생선살이 들어가면 어묵의 색이 어둡습니다.” 부평식품이 들어서 있는 구간은 부평깡통시장 안에서도 1라인이라고 하여 핵심 상권에 드는, 말하자면 목 좋은 곳이다. 그래서 전통시장의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할 때도 제일 먼저 아케이드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하늘 좀 봐요. 어디 외국에 온 것 같애. 조명도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저는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에게도 위를 좀 쳐다보라고 해요. 너무 좋은거예요. 예전에는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하면 천막이 바람에 펄럭거리고 비가 들이치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끄떡없어요. 비가 오나눈이 오나 뭔 상관이에요. 똑같은 천장, 불빛이 너무 아름답고 좋아요

소녀 같다. 매일 장사를 하는 하늘에 어느날, 천장이 설치되고 별빛 닮은조명이 하늘에서 반짝이게 됐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에겐 전등 불빛이 별빛보다 더 아름다웠 으리라.

“우리 골목, 여기가 1라인인데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녀요. 음식을 파는곳은 아무래도 예쁜 엄마들이 있어야 장사가 잘되거든요. 우리 골목은 예쁜 엄마들이 많아요. 제가 볼 때는 그래요. 게으름도 안 피우고, 춤추러 다니는 사람도 없고. 춤추러 다니고 이러는 사람들은 예쁜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새벽 일찍부터 나와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정말 모두들 열심히 삽니다. 그래서 우리 골목은, 다른 곳보다 훨씬 활성화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송종숙 사장은 부평깡통시장이 너무 고맙다고 한다. 물론 노력도했지만 아무것도 없이 살던인생을 자수성가로 우뚝 설 수 있게 해 준 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장에 애착도 많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다시 아침이 되어 시장에 나오면 생기가 돈다고.

“시장에 나와 사람들과 인사를 하다 보면요, 다 그냥 골목 안 사람들과는 눈빛으로 말해요. 서로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다들 오래 되었죠. 너무 힘들 때는 이제 그만 손을 떼야 되지 않겠나, 하다가도 아침에 나와 람들만 만나면 또 재미나고 하루가 금방 가버린다니까요.”

다만 송 씨는 양가 부모님이 우리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그게 마음에 안됐다고 했다. 참 좋아하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가족들과의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가족들에게 시간 여유를 내서 좀 더 함께하고 싶어요. 어묵상을하면서 아이 셋을 키웠어요. 막내는 아직 학생이고 위로 둘은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엄마 아빠 바쁜 중에서도 다 잘 자라 주어 그게 너무 고마울 따름입니다. 큰아들은 여기 근처에서 올해 5월에 분식점을 열었어요. 고생스러울 것 같아 말렸는데 기어이 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나름대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데, 그걸 보면 마음이 짠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 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부평식품 몇 집 건너 양쪽 골목 코너를 물고 있는 큰 분식가게, 사거리분식이 바로 부평식품 큰아들이 하는 가게이다. 시장 한가운데에 분식집으로 출사표를 던진 총각의 용기가 멋지다. 송종숙사장 부부, 그리고 자녀들, 모두 어묵업계에서 자랑할 만한 멋진가족, 좋은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