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역사관

1903년 부평동 일대 모습

부산은 ‘시장의 도시’이다. 수많은 피란민이 모여 지금의 부산을 형성했고, 이들이 타지에서 생활의 근거지를 찾아야 했던 곳이 시장이었다. 먹기 위 해서 무엇이라도 팔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먹어야 했기에, 부 산의 시장은 그만큼 커다란 절박함 속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부평깡통시장’은 한국근현대사의 그늘 속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공 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생필품시장으로 개설된 조선 최대의 공 설시장이었고, 한국전쟁의 뒤안길 속에서는 군수물자 암거래시장인 ‘깡 통시장’이 성업했던 곳이다. 지금은 부산 최대의 야시장이 부산의 밤을 밝 히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부산의 부엌’이라 할 만큼 다양한 음 식을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식도락의 중심지이면서, 부산을 상징하는 문화 관광형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부평깡통시장은 1910년 부평정시장(富平町市場)으로 개설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원도심 주변에 초량왜관이 들어서고,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조성 되면서 일본인들의 식료품 및 생활필수 품을 거래하기 위한 일본인시장으로 개설되었다.

부평시장은 일명 ‘깡통시장’이라고도 불린다. “와 깡통시장이냐꼬? 깡통을 팔았으이 깡통시장이지.” 반평생을 이곳에 터를 잡은 어느 할머니의 명쾌한(?) 대답이다. 깡통시장은 부평시장 수입제품 골목을 이르는 말이다. ‘외 제골목’이라 하기도 하고 ‘도깨비 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1914년에 발효된 조선총독부 ‘시장규칙’에 따르면 당시 부평정시장은 우 리나라 최초의 공설 시장이었다. 부평정시장은 제2호 시장으로도 불렸는 데, 이는 20명 이상의 상인이 한 장소에서 장을 여는 시장을 의미한다. 이 시장 모퉁이에 백풍가(白風街)라는 골목이 있었는데, 늘 이곳에는 흰 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 물품을 사기 위해 서성였다고 한다. 당시 이국의 물품과 음식들이 신기하고 좋기도 했으리라.

아주 오래전에는 국제시장과 통칭해 ‘도떼기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다. 말 그대로 ‘깡통음식’을 팔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미군이 주둔하면 서, 이들이 먹던 깡통음식들이 음성적으로 대거 반출되는데, 이 물건들을 난전에서 사고팔았던 것이 깡통시장의 시작이다. 원래 미군이 주둔한 지 역의 주요시장에는 깡통시장이 존재했는데, 그중 부평시장이 그 규모나 취급하는 제품이 다양했다고 한다. 한때는 외국 밀수품 판매의 근거지라 는 오명도 얻었지만,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 속 산증인으로서 지금에 이 르고 있다.

부평시장에서 미군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양키장수’라했는데, 그들 은 ‘양공주’에게 술, 담배, 과일, 식료품 등을 넘겨받아 쏠쏠한 이익을 남기 고 팔았다. 당시 이 미군물품으로 깡통시장 일대는 활기가 흘러넘쳤다.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했는데, 대표적으로 빵, 과자, 고기, 과일, 커피, 술 등 의 식품에서부터 트리오, 샴푸, 그릇, 화장품등 생필품, 의약품이나 라디오, 전축 같은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했다.

현재 부평깡통시장에는 3개 블록에 400여 개의 점포가 각종 수입제품 을 판매하고 있는데, 외국 상품에 관한 한 무엇이든지 주문만 하면 이곳 에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 한 평쯤 되는 공간에 수입상품들이 저마다 빼곡하게 들어찼다. 어떻게 저렇게 탑을 쌓듯 촘촘하게 진열할 수가 있 을까? 깡통제품은 ‘레고’를 쌓듯 키 높이까지 쌓았고, 양주는 양주대로 ‘맛있게’ 진열해 술꾼들을 유혹한다. 주로 ‘일제, 미제’가 주류를 이루고, 깡통시장 명성에 걸맞게 인도,중국, 태국, 심지어 남미 인디오들의 수공 예품까지 없는 게 없을 정도다.

부평깡통시장 인근에는 한복골목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녀자들이 미군부대에서 밀반출된 군복을 우리 몸에 맞게 수선하여 팔던 곳이다. 그러다 국제시장이 생기면서 국제시장 포목점에서 포목을 구입하여 수공으로 한복을 지어 팔기 시작한 것이 한복거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지금은 한복을 맞추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면서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 지만, 1960~80년대까지는 이곳에서 만든 한복이 맵시 있고 아름답고 바느질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부평깡통시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의 발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부산음식문화의 새로운 원형이 태동한 곳으로, 특히 부산어묵과 부산 돼지국밥의 발상지로서의 그 위상은 매우 크다 하겠다. ‘부산어묵’의 시작은 문헌상으로 부산 부평시장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부산어묵은 일본의 ‘가마보코(蒲鉾,かまぼこ)’라는 음식에서 유래한것 으로, 생선살을 으깨고 반죽해서 튀기거나 찌거나 구운 생선묵 형태의 음 식을 말한다. 1915년 부산부청 발간「 부평시장월보」를 보면, 주요 점포 중에 가마보코 전문 점포 3곳이 최초로 기록되어있다.

부산어묵의 원조시장이다 보니 지금도 부산어묵 대표 판매시장으로 어묵 관련 점포 입점비율이나 생산량에 있어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재 총 20여 개 점포가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부산돼지국밥도 그 원형은 부평 깡통시장에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부평깡통시장에서 터를 잡은 이북 여 인들이 돼지의 대가리와 부산물을 넣고 끓여낸 것이 오늘의 부산돼지국밥 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부평시장은 전통의 부산어묵과 부산돼지 국밥을 취급하는 여러 곳이 영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부평깡통시장 죽 골목도 그 역사가 깊다.

1910년대 중반 부평정시장

1952년 부평시장 양은그릇상점

1952년 경 부평시장

1952년 경 고춧가루 판매노점

1952년 경 야채가게

1952년 경 소양전공사 앞

국제시장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부평깡통시장에서는 한국전 쟁 시절 미군부대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걷어서 죽을 만들어 팔았는 데, 일명 ‘꿀꿀이죽’, ‘UN탕’이라고 불리던 음식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부 대찌개의 원조라 할 수도 있겠다. 당시 꿀꿀이죽은 육식을 위주로 하던 미 군들의 잔반으로 끓여냈기에, 소시지, 햄 등이 들어가 있어 피란민들의 주 요한 단백질 공급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죽집 옆으로는 죽거리집들이 한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죽거 리와 선식, 이유식들을 팔고 있는데 참살이가 유행하면서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한 20년 전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이곳은 이제 10여집이 큰 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잡곡 40~50가지와 야채 50~60가지를 준비하 여 고객의 입맛대로 섞어 빻아 주는데 여름철에는 시원한 미숫가루 주문 이 많다고 한다.

이렇듯 부평깡통시장의 ‘전쟁음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피란민을 먹여 살렸던 부산 특유의 ‘공유와 배려’의 음식문화를 태동시키는 데 일조 를 했다. 같은 값이면 양 많고 맛있는 음식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나 누는 음식이 부산음식의 특징이자 미덕이었다. 이 음식들로 지난했던 시 절 굶주린 이들은, 가족과 더불어 하루의 끼니를 이어나갔던 것이다.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 부평시 장의 새로운 지역음식이 각광받고 있 다. 유부 속에 당면을 넣고 탕으로 끓여낸 ‘유부주머니 전골’과 구수하고 매콤한 맛에 씹는 맛까지 일품인 ‘비빔당면’, 부산어묵을 잔뜩 넣고 볶아낸 ‘어묵잡채’, 그 외에 ‘어묵꼬치’와 ‘떡볶이’ 등이 그것이다.

2014년부터는 ‘문화관광형 시장’이라는 이름을 붙여 ‘밤의 시장’인 ‘부평 깡통야시장’이 개설되면서 부평시장은 더욱 인기 가도를 타고 있다. 어둠 이 들면 기존 부평깡통시장 100여 미터의 골목에 수십 개의 이동형 판매 대가 일렬로 속속 들어선다. 어둠이 내리는 무렵부터 자정 가까이까지 시 장을 운영하는데, 진열대마다 다양하고 특색 있는 세계음식이 선보인다.

늘어서 있는 진열대에는 부산의 향토 먹거리와 외국 다문화 음식, 색다른 유행의 퓨전 먹거리 아이템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다. 천천히 걸으며 그 면면을 살펴본다.

문어에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문어치즈바, 야채에 대패 삼겹살을 말아낸 대패삼겹말이, 얇게 저민 소고기를 노릇하게 구운 소고기 육전, 가리비 위 에 치즈를 올려 구운 가리비 치즈구이, 치즈를 튀겨낸 우유튀김, 즉석 소고 기초밥, 칠게를 튀긴 베이비 크랩, 소라구이와 문어구이 등 다양한 꼬치류, 소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소스를 듬뿍 올린 큐브스테이크, 다양한 소스로 볶아낸 돼지곱창과 돼지껍데기, 달달한 디저트 빵과 빵 속에 수프를 담아 서 먹는 빠네수프, 컵에 각양각색의 전구를 반짝반짝 달고 눈으로 먹는 생 과일주스 등등, 음식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면서도 제각각 나름 의 퓨전적인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몇몇 매대에서는 일본, 중국, 동남아 등 다문화음식을 직접 조리해 판매를 하는데, 그 종류도 넉넉하다. 베트남 튀김만두 짜요 와 쌀국수, 인도네시아의 볶음국수 미고랭, 중국식 만두 딤섬, 문 어를 넣고 구운 일본식 풀빵 타코야끼,

터키 아이스크림, 홍콩 에 그 와플 등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음식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것도 깡통야시장의 매력이다.

이렇듯 부평깡통시장은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시장이면서 부산 최초의 야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과 더불어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이라는 고난과 격동 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떠안았던 시장. 그래서 시민들에게 더욱 애 틋이 사랑받는 시장이다.

그러하기에 이곳에서 태동한 음식의 유래와 탄생배경, 시장의 역 사와 시장의 명물 등을 콘텐츠화하여 방문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이를 자원화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야시장 내에서 세 계 각국의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다문화 음식 문화가 꽃피는 ‘다문 화 음식의 발상지화’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