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공어묵이종규 사장

환공어묵은 부산어묵의 대표브랜드 중 하나다. 부산어묵의 원조격에 해당하며 해썹(HACCP) 인증 마크를 단 최고의 제품이다. ‘부산어묵’하면 ‘환공어묵’, ‘환공어묵’ 하면 이 사람, 이종규 사장(1940년생)을 빼놓을 수없다. 이종규 씨와 환공어묵의 인연은 1961년부터 시작되었다. “부산에 내려와 일을 함 배워보는 게 어떻겠노.” 이종형인 서엽 씨의 권유였다.

서엽 씨는 환공어묵 설립자인 서동진 씨의 아들로 이종규 씨와는 이종사촌 간이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씨는 1961년 22살 되던 해에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부산으로 왔다. 환공어묵에 입사한후 틈틈이 어묵기술을 익힌 이 씨는 1971년 이 회사에 입사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영주동시장에 ‘영성식품’이란 상호를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3년 뒤에는 다시 부평깡통시장으로 들어왔다. 영성식품이 번창하여 그동안 시장 안에 건물을 구입해 두었기 때문이다. 장림에도 땅을 사 공장을 지어 올렸다. 1990년 이종규 씨는 20년간 경영해 왔던 영성식품 건물과 공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임대를 주게 된다. 그때 서엽 씨가, 독립해 나갔던 이종규 씨에게 환공어묵 점포에 임대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

그 사이 설립자인 서동진 씨는 작고하였고, 아들 서엽 씨가 가업을 이어받아 경영하고 있었다. 이종규 씨는 생각했다. 어묵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도 환공어묵이었고, 어묵기술을 익혀 공장을 차려 나가기까지 모태가 되었던 장소도 환공어묵이 아니었던가. 이 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97년 3월, 서엽 씨가 다시 이종규 씨를 찾아왔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27억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나를 좀 도와주면 안 되겠나.” “27억만 있으면 다 해결되겠습니까?” “그래, 그 돈만 투입되면 회사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종규 씨는 깊은 생각 끝에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그 전에 형님이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 말대로 해 주신다 하면 그리 해보지요. 우선 생산직 종업원 주·야간 합해 160명 되는 인원을 110명으로 맞춰 주이소. 사무실 직원도 40명에서 15명만 남기고 다 내보내고요. 형님도 앞으로 딱 3년 동안은 회사 운영에서 손을 떼셔야 합니다. 형님하고 저하고 경영방식이 서로 다르다 아닙니까. 제가 하는 방식대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3년 뒤에 회사 빚은 다 못 갚는다 하더라도 회사는 정상화되도록 해 가지고 형님께 그대로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한테 원금 27억만 돌려 주이소. 지금도 나는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으니까 원금만 돌려주시면 됩니다.”

그 당시 영성식품으로 일군 이종규씨의 재산은 상당하였다. 이 씨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지만 자신을 있게 한 환공어묵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형과 같았다. 서엽 씨는 동생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 때부터 각종 서류에는 이종규 씨의도장이 찍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씨가 막상 환공어묵의 회사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27억으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채의 규모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큰 액수였다.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이씨는 이리저리 융통을 해 55억을 쏟아 부었다. 그해 11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IMF사태가 터진 것이다. 거래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자금회수가 되지 않았다. 어음이든 당좌든 모두가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1998년, 환공어묵은 부도를 맞았다. 3년 전에 신축한 김해진례공장이 경매에 나왔다. 이종규 씨의 모든 부동산과 재산에도 경매 딱지가 붙었다. 이씨가 20년 동안 영성식품으로 일궈 왔던 전재산이 한순간에 다 날아 가 버렸다. “그런데 말이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요. 지금 생각해 봐도 참 꿈같은 일인데요. 공장을 낙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경매에 넘어간 공장을 다시 찾는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1999년 3월에 5차까지 경매에 나왔었지요. 5차에서 잡았습니다.”

이미 업계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뒤였다. 부도가 난 상황에서 누가 도움을줄까. 그런데 이종규 씨에게는 그의 손을 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씨의 삶을 지켜보았던 가까운 지인들이었다. 공장낙찰을 받아 보라며 선뜻 큰돈을 건네 준 이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몇몇 사람이 힘을 보태 주었다. 이종규 씨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그걸로 낙찰계약금을 치렀지요. 계약금 치른 영수증을 들고 은행을 찾아가니 은행이 다시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에, 이번에는 환공어묵 본점이 있는 건물이 또 경매에 나왔어요. 지금 바로 이 건물이지요.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덕도 여러 번 봤지요. 어느 해는 10억이 좀 넘는 자금이 필요해 은행을 갔었어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 사이 제가 가진 땅의 공시지가가 올라버린 겁니다. 원래 청정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에 대통령이 나고 보니 그만 청정지역이 공업지역으로 바뀌어 버린 거지요. 은행에서 두말도 않고 10억을 해 주었어요. 그 다음 해에 가니 또 공시지가가 올랐다 하고, 그 다음해에도 또 올랐다 하고… 그래, 그 바람에 회사가 살아났지요.”

공장은 김해에, 본 매장에서는 소규모 수제어묵라인 운영

“참 고마웠어요. 맨 몸뚱이 하나로 시작해 몇십 년 동안 남부럽지 않게 재산을 일구었다가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졌을 땐 정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일어 설 기회가 주어지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세상이 고맙고, 손님들이 고맙고, 업체들도 고맙고,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고맙지 뭡니까. 그래, 생각해 낸 것이, 얼마라도 매월 일정 금액을 떼어 몇몇 기관에 두루 기부를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했지요. 그랬더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겁니다. 마음의 빚이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게 15년째네요.”

이종규 씨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그 고마움을 전하고 있었다. 멋진 사람이다. 단단해 보이는 얼굴 너머로 느껴지는 겸손과 넉넉함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 같았으면 좌절해 일어나지도 못 할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 갈 수 있었을까. 불굴의 의지,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종규씨에게서 뜻하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사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이유가 따로 있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네 살 때 바로 밑에 동생이 막 돌이 지났을 때였죠. 참 힘들게 컸지요. 말도 못할 정도로 설움도 많았어요. 그 서러움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잘 살아야 되겠다, 그 마음뿐이었어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이를 앙다물고 버텼죠. 큰 설움이 내겐 오히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린 날, 젊은 날에 돈 있고, 힘 있고, 권력 있는 많은 사람을 봤지요.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난 나중에 잘 되었을 때, 성공했을 때 절대 저런 사람들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노점에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내가 먼저 다가가 인사하리라. 그런 마음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종규 씨의 얼굴이 붉어진다. 지난했던 그의 삶이, 채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가슴속 설움이 여전히 울컥, 하고 가슴을 치받는 모양이었다. 이 씨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작년에 새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영정사진 앞에 앉아 돌아가신 그분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니 사진 속 얼굴이 어찌 그리 인자하게 보이실까요. 그러다 문득 깨달음 하나가 가슴을 치는 겁니다.

어머니한테 새 집을 하나 못 지어 드렸구나.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옛날에, 잘살던 시절에 1억, 2억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골집하나를 번듯하게 지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그걸 못 했어요. 몰랐지요. 그때는. 이게 그리 후회가 될 줄은요.” “좋은 에너지든 나쁜 에너지든 우리 인생은 우리를 어디론가 끌어가는 힘이 있어요. 그걸 잘 활용하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살아 보니 젊은 사람들에게 그걸 알려 주고 싶어요. 좋아도 그렇게 좋은 게 아니고, 나빠도 그렇게 나쁜 시간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진정성은 역시 큰 힘을 지니는 법이다. 22살 앳된 얼굴에서 우직하게 한평생을 외길로 걸어와 노인의 얼굴로 바뀌어 버린 이종규 사장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왜소한 체격, 진솔하고 겸손한 말투, 하지만 결기에 찬 표정.

환공어묵의 명성이 오늘날까지 계속될 수 있게 한 산증인의 모습이다. 환공어묵은 이제 대를 이어 연결되고 있다. 큰아들, 작은아들이 모두 환공어묵의 경영인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부산어묵의 산 역사, 부산어묵이란 브랜드를 전국에 알린 환공어묵은 탄탄대로를 걸어 미래에도 최고로 맛있는 부산어묵의 자리를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