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식품 효성어묵홍순복 사장

대도식품 홍순복 사장은 1950년대 어머니가 하던 어묵상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는 아들이 가게에 들어 와 함께 일을 하고있으니 3대에 걸친 어묵상이다. 홍순복 씨의 어머니 이임순 씨가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 피란 내려와 부평깡통시장 안에서 어묵장사를 시작한 이후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한 장소, 하나의 품목으로만 영업 하면서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어묵은요, 빈부차가 없는 음식이요. 남녀노소도 없고요. 6·25때 그때는요, 없던때라 값도 싸고 맛있는 어묵을 누구든 다 먹었지요. 구운 것도 맛있고 찐 것도 맛있고, 금방 튀겨 나오는 걸 입에 넣으면 그냥 살살 녹아요. 서 노인(환공식품 설립자 서동진 씨를 말함)이 만들어 주는 기젤 맛있었어요. 몇 개를 집어 먹어도, 또 먹고 싶고 그랬지.사람에 따라 옛날 어린 날에 먹던 어묵이 더 맛있었다고 하는 이들을 종종본다. 대도식품 홍순복 사장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70여 년을 어묵과 함께 살아 왔어도 어렸을 때, 어머니 곁에서 먹었던, 입에 넣으면 살살 녹았던 그 어묵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혹은 가난의 맛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닷게 있잖아요. 그걸 상인들이 칫솔로 박박 문질러 씻거든요. 깨끗하게 보일라고. 그럼 깨끗하고 예쁘게 보여 손님들이 잘 사 가져가고, 값도 좀 낫게 쳐서 받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요, 그게 박박 씻으면 게의 맛있는 거, 단맛 같은 기 다 빠져나가거든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요. 어묵도 그거하고 같아요. 옛날에는 생선대가리 떼고, 꼬리 떼고, 창자를 빼고 난 뒤 뼈째 갈아서 만들었거든요. 그러니 칼슘도 많고 고소했지. 그런데 지금은 워낙 위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생선살만 가지고 만들지. 그것도 씻고 씻고 또 씻어 맛있는 기름 성분은 다 빠져나가고 없는 기라. 그러니 옛날만 맛이 못하지. 그래도 어쩌겠어요. 지금은 시대가 먹거리에 엄격하고 또 위생적인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까 할 수 없지.”

홍순복 씨와 어묵과의 첫 인연은 그때, 몹시 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이었다. 홍 씨는 1942년생으로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하여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왔다. 대구에서 살던 홍 씨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부산으로 내려왔다.

산에 별다른 연고가 없던 홍 씨의 부모는 부산에서 살 길이 막막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머니 이임순 씨의 어묵장사였다. 처음에는 부평깡통시장 골목 안에서 소규모로 어묵을 생산하던 배 씨에게서 물건을 받았다. 얼마 뒤에는 일본인 공장에서 어묵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직접 어묵을 만들었던 서 노인으로부터 물건을 받아 장사를 했다. “내가 어머니의 어묵노점상을 이어받은 것은 군대를 막 다녀 온 26살 때였어요. 환공어묵 점포에 임대를 얻어들어갈 때까지 했으니 꽤 오래 노점상을 했지요. 환공어묵에서는 11~12년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있는 이 건물을 사서 들어왔지요. 효성어묵은 이 건물에 들어오면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한 25년은 족히 되었을 성싶어요.”

“란(난초)이 젤 맛있어요. 납작하고 네모난 거, 회사들마다 다 이름이 다르지만 우리는 그걸 란이라고 해요. 그게 젤 많이 나가요. 원래 란은 상중하(上中下) 세 종류가 있는데 옛날에 나왔었던 하(下)는 현재 아예 생산이 중단되었고요. 중품도 있지만 우리 가게에서는 상 위로만 유통합니다. 상은 다시 여러 종류로 나뉘죠. 상은 백평 혹은 상천이라고도 하는데 어묵꼬치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져가고요. 또 납작한 것 중에 야채사각이라는 종류가 있는데 이것도 많이 가져가고요. 그 위로 삼백란이 있어요. 오백국이란 것도 있고요. 특상(천)은 매(매화)라고해요. 품질 차이죠. 맛의 차이, 그램수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묵꼬치하는 사람들은 상천이나 야채사각을 많이 구입해 가고, 일식 당이나 고급식당에는 삼백란, 오백국이 많이 들어가지요. 오백국은 고급 김밥집에도 들어가고요.”

“효성어묵은 이 근방에서 보면 후발주자로 그때 막 설립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었던 효성어묵 설립자 김천환 씨를 그때 만난 거지요. 효성어묵을 접하고 보니 아, 이거면 됐다, 싶은 맛이 있었어요. 고소한 맛이 나는 겁니다. 뒷맛이 고소했어요. 손으로 만졌을 때도 고소한 맛이 납니다.”

홍순복 씨는 어묵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다. 직접 어묵을 생산하지는 않았어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회사에서 생산된 각종 어묵 제품을 비교, 선정해 판매해 온 까닭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은 좋은 어묵을 알아보는 능력을 키웠다. 홍 씨는 눈으로 한 번 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어묵을 알아본다. 손으로 만져 본다면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다. 현재 대도식품에서 판매하고 있는 어묵 중에 가장 잘나가는 어묵은 ‘란’이라고 한다. 란이라니, 혹시 매란국죽송(매화·난초·국화·대나무·소나무) 하는 그‘란’ 말인가. 홍 씨는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송(소나무)은 찐 어묵을 말하는데요. 납작한 판에 반달 형태로 동그랗게 만든 어묵이죠. 하얀 어묵속에 꽃처럼 예쁜 핑크색이나 다른 색깔의 장식이 들어가 있어요.” “죽(대나무)은 속에, 왜, 구멍 뚫린어묵 있지요, 그걸 말해요. 황금죽혹은 청죽이라 부르고요. 검은 빛깔 나는 구멍 뚫린 어묵은 오죽이라고 하지요. 기름에 안 튀기고 구운 것, 찐 것 등 이것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청죽이 더 품질이 좋아요. 가정에서 먹거나 제사 때 쓸 탕을 끓이거나 할 때는 청죽을 많이 쓰고요, 일반 식당에서는 오죽을 많이 쓰지요.”

“모둠이라는 상품은요, 묶음으로 파는 건데 보통은 1봉지에 1만원에 팝니다. 이 모둠상품을 제가 우리나라에서 젤 처음 만들었어요. 우리 가게에서처음 이렇게 모둠으로 상품을 만들자 금세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모둠은 완전 고급 제품만 담아요. 치즈, 오징어, 해물, 깻잎, 순흰생선살, 파, 땡초 이런 것들이 들어간 어묵이지요. 지금은 종류 따라 봉지당 1만원, 1만5천원, 2만원짜리를 만들어 팔고 있어요.”

1950년대부터 부평깡통시장에 살면서 어묵상으로 살아왔으니 누구보다어묵의 역사에 대해 잘 알 것 같다.

“많이 변화되었어요.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고. 옛날에는 여기에 어묵공장이 두 개 있었어요. 조그마하게 배 씨가 손으로 만들어 파는 데가 있었는데 그건 작은 데라 그렇고,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환공과 미도지요. 미도어묵, 그 자리는 원래 기름공장이었어요. 식용유 공장요. 도 씨가 했었는데, 도 씨가 기름공장을 치우고 어묵공장을 차렸어요. 지금의 미도는 그 도 씨에게서 인수한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미도는 공장을 장림으로 옮겼고, 환공은 감천으로 옮겼지요.”

“불도 여러 번 났었어요. 가장 최근에는 환공과 미도에 크게 불이 났죠. 일대가 다 불에 탔어요. 그전에도 불은 많이 났었고요. 아무래도 어묵이 기름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불이 많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홍순복 씨는 이제 큰 욕심이 없다. 다만 아들이 업을 이어 하고 있으니 부평깡통시장이 좀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또한 상인들이 외국에 나가 전통시장을 견학할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한단다.

“애들 잘되는 거, 그거 하나 바래요. 이제 다른 게 뭐 있나요. 젊을 때야 여행도 하고 싶고 등산도 하고 싶었어요. 열심히 살다 보니 마음만 있을 뿐 별로 다니질 못했거든요.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몸도 안 따라주고 해서 요즘엔 가끔 절에만 다닙니다. 그래서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 말해요. 젊을 때 많이 다니라고요. 젊을 때 일본 요코하마를 딱 한 번 간 적이 있었지요. 봄이라 꽃이 아름답게 피었는데 그 위로 비치는 조명이얼마나 이뻤던지…. 아직도 일본의 그 전통시장이 가끔씩 생각납니다.”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을 상인들에게 보여 주는 게 좋아요. 한 번 나갔다 오면 보이거든.

어떤 부분이 선진화되었는지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나이가 많든 적든 한 번 나갔다 오면 도움이 많이 돼요. 젊을 때 한 번 가 보았던 요코하마의 재래시장이 참 잘 되어 있어, 느끼는 점이 많았어요. 그 나라의 좋은 점을 우리 시장에도 접목시켜야 되겠다 느껴지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어묵노점상을 하던 어머니의 업을 물려받아 한평생 어묵상으로 살았던 홍순복 씨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 드렸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
“살아온 기 다 고생이지. 뭐 다른 기 있나. 옛날 사람들, 나뿐만이 아니라 다 고생하고 살았어요. 높은데 있는 사람들이야 좀 편하게 살았을란가 몰라도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다 고생스럽게 살았지. 그냥 하루하루 장사 잘되고 자식들 잘 크면 그저 그 낙으로 살아왔지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땀 흘리며 살아 온 홍순복 사장, 이제 여행도 다니시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등산도 다니시고 건강하시길 바란다. 이 땅 위의 아버지들이여. 지난한 역사의 산 증인들이여, 치열하게 살아 온 그들의 삶과 노고에 헌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