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즉석어묵최철욱·최옥자 사장

20008년 어느 날, 실의에 빠져 있던 채철욱 씨(1962년생) 앞으로 소주와 어묵 한 접시가 쑥 들어왔다. “소주 한잔하자.” 사촌형이었다. 채철욱 씨는 형이 내미는 소주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어묵 한 접시. 사촌형이 방금 튀겨 낸 어묵이었다. 뜨끈한 어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즈음 채 씨는 입맛이 썼다.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모를 지경으로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뜨끈한 어묵이 혀끝에 닿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내가 달리 도와줄 꺼는 음꼬, 니가 이걸 배워보겠다하믄 내 다 갈쳐 주꾸마.” 어묵을 배워보라는 형의 권유였다.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6개월 전, 사업에 실패하고 난 뒤로는 속이 답답하고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같이 복잡하기만 하였다. 울화통으로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도저히 속이 답답해 못 견딜 때면 형을 찾아오곤 하였는데 그 날이 세 번째였다.

채철욱 씨는 어묵 한 조각을 다시 집어 입안에 사촌형이 하는 말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어묵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희망의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어릴 때 충무동시장에서 어묵공장을 하던 큰집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묵이 만들어져 나오는 과정을 신기하게 지켜보고 섰다가 어묵이 갓 나오면 하나씩 얻어먹곤 했던 기억. 잊고 있었던 따뜻한 추억이었다. “니도 해 봤다 아이가. 첨도 아니고. 내야 한평생 어묵말고는 해본 게 음따마는 니는 이런저런 오만때만(온갖) 일 다 해봤다 아이가. 니가 맘먹고 한다치믄 내보다 잘할끼다. 니는 창의성이 있어가 훨씬 잘할끼다.”

채철욱 씨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 사촌형의 어묵공장에서 잠시 일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 무렵 충무동시장의 형 가게에서 2년 동안 생산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어릴 때라 어묵기술로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형도 딱히 어묵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알려주지 않아 다른 직장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형을 만난 그날 저녁, 채 씨는 아내 최옥자 씨(1962년생)와 함께 둘이서 자주 다녔던 송도 암남공원에 갔다.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 내려가 송도바위 위에 서니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물속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래도 나름 크게 한 사업이었고, 남들에게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이제 망해 손에 직접 어묵 반죽을 묻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인생길에서 성공을향해 올라갈 때는 모른다. 정상에 서 있다가 떨어질 때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따르는 법. 새로운 발자국을 떼기 위해선 우선 나를 온전히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극심한 고통. 그때 아내가 말했다. “이제 우리 다 떨쳐 버립시다”라고. “그래, 새로 시작해 보는 거야.”

채철욱 씨는 아내와 함께 새로 인생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날 형과의 만남은 채철욱 씨가 부평깡통시장에서 즉석어묵 가게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먼저 부평깡통시장 안에 가게를 열었다. 어묵가게를하려면 부평동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날부터 그는 형의 어묵가게가 있는 서동으로 출근했다. 형은 원래 그 윗대부터 충무동시장에서 어묵을 만들었지만 그 즈음에는 충무동시장에서 금정구 서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결국 채 씨는 20여 년간 여러직업을 돌고 돌다가 다시 첫 직업이었던 어묵 만드는 직업으로 원점회귀하게 된 셈이다.

채철욱 씨는 3개월을 하루도 빼지 않고 서동으로 출근했다. 형은 어릴 때부터 친했던 사촌동생을 위해, 재기하고자 노력하는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채 씨는 형의 기본 어묵기술을 착실히 익혔 고, 부평깡통시장에서 즉석어묵 가게를 열었다. 형은 평생 3, 4종류의 어묵만을 생산하였는데 그 기술을 전수받은 채철욱 씨는 현재 자신이 직접 개발한 15종이 넘는 어묵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거요, 이게 다 영광의 상처 아닙니까.” 채 씨의 팔뚝에는 화상 자국이 많다. 바쁠 땐 기름에 데어도 아픈 줄을 모른단다.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어야 비로소 기름에 데인 팔뚝이 화끈거려 화상을 입은 사실을 알아챈다고. 즉석어묵은 반죽에서부터 완전한 제품인 어묵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공정 과정이 수작업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손을 다치는 일이많다. 그래도 새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일터에서 원없이 일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금방 나온 뜨끈뜨끈한 즉석어묵은 반응이 좋았다. 하루하루 들어온 주문을 소화해내는 것도 버거울 만큼 주문량이 많았다. 대량 생산시설을 갖춘 자동화된 어묵공장이 아니니 하루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로지 손으로만 하는 수작업 물량에 한계가 왔다. ‘6시 내고향, 최고가 좋다’라는 프로그램 코너에 ‘최고’로 방송을 타게 된 것이었다.

“금요일에 방송이 나갔지요. 토요일엔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그러더니 그 다음 날인 일요일엔 사람들이 손에 만 원짜리 한 장씩을 들고 쭉, 줄을 서더란 말입니다. 방송의 위력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반자동화 기계로 즉석수제어묵을 생산하는 모습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더 이상 수작업만으로는 물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 다. 채 씨는 자신의 가게에 적합한 반자동기계를 주문 제작해 설비를 갖췄 다. 하지만 반자동기계는 그야말로 반자동, 사람의 손이 가야 자동화 된 기 계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계에 손이 익지 않아 오히려 손으로 할 때보다 작업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작업이 더뎌 기계를 세워두 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다 3개월 쯤 지나니 기계와 익숙해지고 6개월이 지 나니 기계는 이제 손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산량을 대폭 늘린 부평즉석어묵은 이후 승승장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일 만들어 당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죠. 신선하니까요. 그래 서 유치원 간식으로도 많이 들어갑니다. 유치원 같은 곳은 특히 더 신경이 쓰이죠. 자라나는 유아들에게 먹일 음식이니까요.” 채 씨는 즉석어묵의 장점으로 신선함을 꼽는다. 원재료인 생선살은 75% 이상, 야채, 잡채 등 부재료와 찹쌀가루, 전분 등은 모두 합해 25% 이하로 맞추어 반죽을 한 다.기름 또한 중요하다. 신선하고 맛있는 어묵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선한 재료 못지않게 신선한 기름을 쓰는 것이 맛의 비결이다. 기름은쉽게 산폐 되기 때문에 좋은 어묵,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어묵카페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공간은 마련해 두었습니다. 시간이나 여건이 허락하질 않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꼭 할 겁니다. 제 이름을 건 수제즉석어묵 브랜드로 수제즉석어묵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꿈이죠.”

“첫 직업이었던 큰집 어묵공장에서의 2년간 의 일을 접고 한 일이 인테 리어 일이었습니다. 5년이 지날 무렵이었는데요. 건물에 공사가 있어 자 재를 싣고 건물의 외벽 위로 물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죠. 물건을 올리 다가 제가 그만 공중에서 물건과 함께 떨어지고 만 겁니다. 그때 정말 죽 는 줄 알았어요. 아찔한 경험이었어요. 죽지는 않았지만 대신 발목 뒷쪽 이 다 부서졌습니다. 병원에서 꼬박 1년 반을 보내야했어요.”

그때 다친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하루 종일 서 있으면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다리가 몹시 아프다고. 하지만 일할 수 있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저는 처음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5만 원짜리 단칸방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해 1000만 원에 20만 원, 그러다 산만디(산비탈의 경사지고 높은곳) 빌라를 거쳐 평지 빌라로 이사하는 등 사는 집도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사업하면서 크게 흥해도 보고, 크게 망해도 보고, 몇 번의 인생 롤러코스터를 탔었지요. 그러다가 이제야 제 직업을 제대로 찾은 느낌입니다.그 전에 아무리 집에 금송아지가 많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현재가 중요한 거죠. 지금은 가족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있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지하공간까지 갖 게 되었으니 제 인생은 성공한 거 아니겠습니까.”

채철욱 씨의 취미는 ‘드럼’을 치는 것이라고 한다. 아직 ‘드 러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지만 몇 년 전 시장의 문광형사업단에서 운영한 취미생활반에서 처음 드럼을 접한 이후 드럼에 푹빠지게 되었다고. ‘이치현과 벗님들’의 드러머 선생님한테 배웠다는데, 시간이 없어 자주 치지는 못한다. 그래도 시간날 때마다 치고 싶어 자신의 집 지하공간에 음악실을 꾸미고 전자드럼을 갖다 놓았다. 언젠가 부평깡통 시장에 ‘어묵축제’가 열리는 날이 온다면 그땐 실력을 발휘 해 볼 생각이다. 그의 꿈과 일터, 가족의 안녕 등 모든 일에 신바람나는 드럼 연주가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